[연재] 외삼미동 해평윤씨 집성촌 이야기

진길장의 오산 집성촌 이야기

진길장 | 기사입력 2020/07/28 [15:36]

[연재] 외삼미동 해평윤씨 집성촌 이야기

진길장의 오산 집성촌 이야기

진길장 | 입력 : 2020/07/28 [15:36]

 외삼미동 해평윤씨 집성촌 이야기

 

오산 외삼미동 해평윤씨 집성촌 이야기    © 진길장

 

오산 외삼미동 해평윤씨(海平尹氏)는 경상도 해평군을 본관으로 삼은 고려 원종 때 수사공(守司空, 1273)으로 왜구와 몽골 침략으로 혼란의 시기에 무장으로서 공을 세운 윤군정(尹君正)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해평윤씨 3세 윤석(尹碩 ?~1348)은 충숙왕 때 정승이 되어 해평부원군(1328)에 봉해졌다. 그는 재임 때 고려를 몽골의 행성(行省)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반대하여 이를 철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해평에서 낙동강 수해를 막기 위해 강변 둑과 숲을 가꾸어 농사를 번성하게 하였다.

 

6세 윤사영은 조선 태종 한성부윤을 지냈는데 도성 건설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8세 윤기반(尹起磻)은 단종 2년(145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삭령군수 경기도사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윤기반은 성종 때 경연에 나가 상서를 올렸는데 부정·비리를 일삼는 관리들을 적발하여 국가 사정에 공헌하였다. 그 후 ‘폐비 사사건’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윤기반의 집안 16명이 참살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이때 어린 혈손 윤응상은 유모에 의해 구출되어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40번지(부릉구리 오리골)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사면 복권되었고, 윤응상에게 사헌부 감찰직을 내려 가문을 재건하게 되었다.

 


오산 외삼미동 해평윤씨 입향조가 된 11세 윤응상은 관직을 받고도 한양으로 가지 않고 피신처인 외삼미동에 정착하게 된다. 지난 갑자사화 때 가몰(家沒)에 대해 다시는 이러한 우환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가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은 다시는 중앙 정치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과(大科)가 아닌 별과(別科)에 출사하였다.

 

대과(大科)에 나가게 되면 결국 중앙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정치세력에 휘둘리게 되어 언제든 정치 싸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란 것이다. 그래서 변방 군현 수령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윤응상 장손자 윤항은 거제현령, 고손자 윤필주는 죽산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후손 대대로 갑산군수 훈련원 주부 등 무반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오산시 외삼미동 부릉구리 오리골에는 작은 못이 샘솟아 한집 살림을 차릴 물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윤응상의 아들 윤완이 지금의 종가집터(외삼미동 214)에서 잠시 쉬는데 신령이 꿈에 나타나 "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 후손이 번성하리라"라고 말을 해 꿈에서 깨어 기이하게 여긴 후 이곳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게 되어 종가댁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종갓집은 17대째 500여 년간을 종택으로 존속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대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지금껏 후손들이 선영의 제향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격변의 역사를 견디며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군현의 수장이 된 양반집에서 유행하는 기와집을 짓지 않고 근검생활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해평윤씨의 농토는 ‘새밀’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농지를 이웃 주민에 임대하고 분할 상환하면 소유권을 넘겨주니 마을 주민들은 자연히 윤씨 집안을 신뢰하였으며, 인근에서 윤 씨와 혼연(婚緣)을 영광으로 알았다.


근대에 이르러 계몽운동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윤학영은 문중과 의논하여 사립학교인 삼미의숙을 세워 빈궁한 주민들에게 신지식을 습득시켜 사회에 진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 수립 후 학교와 부속 토지를 국가에 기부하여 현재 오산 화성교육지원청 부지도 삼미학교 부속 토지였다. 또한, 윤학영은 오산읍장을 지내면서 오산중·고등학교 재정 기부운동과 독산성 유적 중건, 오산 천북(궐동) 개발 등 오산의 도시 세 확장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에는 윤씨 종중에서 거금을 들여 마을 전체 가구에 전기화 사업을 단행하여 다른 지역보다 앞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산골 천수답에 수리조합 저수지(명학호, 방곡호)를 건설하여 흉년에 대비하였고, 주민들에게 공동담보를 세워 금융조합의 대부를 얻어 저수지 수몰지에 대해 보상을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자작농 같기 조합’을 만들게 하였으며, 공동 저축용 창고와 분할 납부 소유권 같기 등을 펼쳤는데 이때 회원 가구 수가 60여 호가 되었다. 한편, 해평윤씨 종가댁 초가집은 1965년 새마을 사업 때까지 유지되었다.

 

수원 북쪽 광교산에서 수원 평야를 동남으로 돌아 청명산, 매미산으로 흐르며 오산 필봉산에 이르러 다시 되돌아 서북 지점 부릉구리 적현봉에 이르는데 산이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이 깊지 않으나 맑아 영묘한 기운이 모이는 곳에 혈을 찾아 묘를 쓰니 이곳이 윤응상의 묘이다. 멸문의 수난으로 잃어버린 조상의 산소를 400여 년만인 1930년대 후손들이 안양 범계와 지곳동 독산성 아래 산재해 있던 선조의 묘를 외삼미동 부릉구리 오리골에 이장하여 외삼미동 해평윤씨 선영으로 조성하여 해마다 가을 후손들이 모여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해평윤씨가 오산시 외삼미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500여 년간 명맥을 이어오면서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면 외삼미동 적현봉 기슭 해평윤씨 선영과 재실, 대사헌신도비, 윤학영 선생 추모비. 삼미초등학교, 윤 씨 종택, 명학호. 방곡호 등 해평윤씨 관련 유적이 전해지고 있다. 삼미는 송미 오미 죽미(松美 梧美 竹美)라는 풍치의 고장이다. 필봉산-적현봉(대사헌신도비)-장암봉(고인돌)-평화공원(반월봉)-세마대는 오산 둘레길이 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고난의 시기에 구원을 펼친 유모의 사적과 이웃 절 암자에 관한 사연이 전설로만 전해지며 흐릿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진길장 선생

 

진길장(陳吉章)


용인 남사 출생. 오산중•고, 한신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학과 졸업. [경기민족문학] 작품 발표. [사람과 땅의 문학] 동인, 『사람과 땅의 문학』 동인지 간행, 주요작품 「연지골 편지」 「흔치고개 휴게소에서」 「불악정에서」 「처서 무렵」  「유월」  「여름」  「靑源寺」  「입동소묘」 등 다수. 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 부회장, 오산성심학교 교사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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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환 2020/09/03 [17:13] 수정 | 삭제
  • 진샘 ㅡ오산인포커스의 얼굴?임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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